주가 폭락하자 오너 3세 아닌 직원에게 경영권 준 이 회사 [마켓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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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10.31. 오후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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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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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화장품회사 에스티 로더
28일 CEO로 파베리 사장 내부 승진
주가 2년 만에 4분의 1 토막
지난해 매출 10% 줄자 결단
몸집 키워 상장한 美 가족회사
4대까지 생존 비율 3.0% 불과
서구권에서도 3세 경영 회의적
28일(현지시간) 세계 3대 화장품 회사로 유명한 에스티 로더가 새로운 CEO로 스테판 드 라 파베리 사장을 낙점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패션지 보그는 CEO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창업자의 손녀 제인 로더 최고 데이터 담당자가 직원들에게 올해 안에 임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내용의 메모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에스티 로더는 미국의 대표적인 가족회사이자 상장 대기업이다. 그렇다면 이사회 의결 지분 80% 이상을 보유한 로더 일가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뭘까. 

화장품회사 에스티 로더 차기 CEO 경쟁에서 밀린 제인 로더(왼쪽)가 2019년 뉴욕에서 열린 패션 갈라쇼에 동생 에어린 로더와 함께 참석했다. [사진=뉴시스]


■ CEO 교체 배경=에스티 로더는 지난해부터 심각한 부진에 시달렸다. 2023년 매출이 2022년 177억4000만 달러에서 10% 이상 감소한 159억1000만 달러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이를 계기로 이사회에서 로더 일가는 차기 CEO 임명을 놓고 대립해왔다. 개인 최대주주이자 CEO를 역임한 창업주의 큰아들 레너드 로더가 지난해 은퇴하면서 이사회는 CEO 승계를 준비했다. 초기에는 랄프 로렌, 룰루레몬 등 외부 출신 인재 영입을 고려했다. 본격적인 차기 CEO 3파전이 벌어진 건 지난해 11월부터다. 

유력 후보 중 하나는 창업주의 손녀이자 지분 6%를 소유한 개인 2대주주 제인 로더였다. 그는 1996년 입사해 마케팅 담당 임원을 거쳤고, 2020년 최고 데이터 책임자에 올랐다.

이사회의 생각은 달랐다. 올해 6월 파브리지오 프레다 CEO를 유임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최종 선택은 스테판 드 라 파베리의 내부 승진이었다. 매출 증대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파베리가 키를 잡자 제인 로더는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에스티 로더의 매출이 줄어든 배경은 복합적이다. 오너 2세인 레너드 로더가 이사회에서 백화점과 같은 전통적 유통채널을 고집하면서 신규 유통채널을 확보하는 작업이 늦어진 게 시작이었다. 중국 시장에서는 수요 예측에 실패해 재고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에스티 로더가 10억 달러를 들여서 5년 전 건설한 일본 공장은 연간 생산능력이 3억개인데 현재 수천만개를 생산하는 데 그치고 있다. 

여기에 에스티 로더 고위직들이 자신들에게 가격 책정 능력이 있다고 오판한 게 치명타를 날렸다. 이코노미스트는 2021년 11월 "에스티 로더 최고회계책임자(CFO)였던 트레이시 트래비스가 '우리는 명품 회사여서 가격 책정 능력이 있다'고 자랑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회사는 3년이 흐른 올해 들어서야 현실을 인식했다. WSJ는 지난 6월 '프레다 CEO는 중국에서 할인 판매가 너무 많았다고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결과는 주가가 말해준다. 프레다 CEO는 2008년 20달러에 불과했던 주가를 중국 시장 공략과 고가 정책으로 2022년 300달러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2년여 만에 주가는 4분의 1 토막 났다. 28일 현재 에스티 로더 주가는 88.72달러다. 

[자료 | 뉴욕증권거래소]


■ 가족 상장회사란 종신형=에스티 로더 오너 3세가 CEO 경쟁에서 탈락하고, 회사를 떠나기로 한 것은 여러 면에서 흥미진진하다. 이 회사는 여전히 가족이 소유한 상장회사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창업자인 에스티 로더는 1995년 큰아들 레너드 로더에게 경영권을 물려줬고, 레너드의 아들 윌리엄이 2004~2008년 CEO직을 승계했다. 로더 가족은 회사 지분의 35%, 의결권의 80%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글로벌 회계법인 언스트앤영이 집계하는 가족회사 매출 순위에서 에스티 로더는 지난해 미국 25위, 세계 102위를 차지했다.

에스티 로더가 아시아 가족 상장회사들처럼 가업을 자손에게 승계하는 데 집착한 것은 아니다. 오너 3세 윌리엄 로더는 2008년 경쟁사 P&G 출신의 프레다를 CEO로 임명한 후 퇴진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상장사를 경영하는 것은 형벌이지만, 가족 상장사를 경영하는 것은 종신형이다. 나는 회사에서 먼저 끌려 나가고 싶진 않았다."

미국에서는 오너 일가가 CEO를 맡아도 의무적 집중투표제, 주주 충실의무, 지배주주 신인의무를 모두 준수해야 한다. 집중투표제는 이사회에서 소액주주가 표를 몰아주는 방식으로 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제도다. 오너 CEO가 보기 싫어하는 인물이라도 얼마든지 이사회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인데, 미국 회사는 집중투표제를 대체로 채택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애리조나주 등에서는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이사가 소액주주들의 이익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이사의 주주충실제도'는 미국 대법원의 여러 판례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회사 임원들은 지배주주의 위법적인 지시나 소액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명령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지배주주가 소액주주에게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를 다해야 한다는 '지배주주의 신인의무'는 델라웨어주 회사법이 명시적으로 규정했고, 역시 광범위하게 적용한다. 지배주주가 회사나 다른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모두 우리나라 상법이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다. 

■ 가족 상장회사의 한계=숫자로만 보면 여전히 전 세계 회사 대부분은 가족이 소유한 회사다. 언스트앤영이 매년 발표하는 가족회사 지수를 보면 세계 가족회사의 23.6%가 미국 회사고, 총수익의 34.0%를 차지한다. 

그러나 미국 컨설팅회사 가족회사연구소(Family Business Institute)에 따르면, CEO 자리가 가족 구성원에게 승계되면 생존력이 급속하게 떨어진다. 오너 2세 체제에서 생존한 가족회사 비율은 30.0%, 오너 3세까지 살아남은 회사 비율은 12.0%에 불과했다. 4세 이상 승계된 가족회사의 3.0%만이 살아남았다. 

에스티 로더의 오너 2세인 레너드 로더가 지난해 은퇴한 이후 이사회는 차기 CEO 찾기에 나섰다. [사진=뉴시스]


에스티 로더처럼 상장한 가족회사가 CEO직 승계와 지분의 상속을 별개로 취급하는 것은 서구권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상장한 가족회사의 규모가 클수록 가족 구성원만으로 소유하고 관리되는 기업의 수는 적어진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은 2015년 "가족회사가 전체 기업의 90% 이상을 차지하지만, 연간 매출 10억 달러를 넘는 미국 기업의 33.0%만이 가족회사"라고 보도했다. 

이코노미스트는 2015년 4월 "상속자를 자녀에게만 한정하는 가족회사는 바보로 남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코노미스트는 '3대에 걸쳐 나막신으로 왔다가 나막신으로 간다'는 영어 속담, '마구간에서 별이 됐다가 다시 마구간으로'라는 이탈리아 속담, '부자는 삼대를 못 간다'는 중국 속담, '3대가 집안을 망친다'는 일본 속담까지 소개하며 가족회사의 자녀 승계를 꼬집었다. 

이번에 에스티 로더 CEO 경쟁에서 탈락해 쫓겨난 제인 로더의 아버지는 로널드 로더다. 로널드는 3대 CEO이자 조카인 윌리엄과 기업 인수 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로날드 로더는 자신이 CEO가 되려고 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딸이 CEO가 되는 것에도 수동적이었다. 로널드는 2008년 "내가 제인이 언젠가 CEO가 되기를 바라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상장 대기업 CEO의 책임은 그만큼 무겁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eongyeon.han@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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