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세상 | 돈 룩 업⓬
전세계 천조국 미국만 바라봐
美, 세계 수호할 정의국가 아냐
평등 의결권 부여한 유엔 총회
유명무실해진 유엔, 떠오른 G7
7개국에 세계 만사 맡겨도 되나
정의, 이미 사라진 달달한 그것거대혜성 디비아스키가 6개월 후 도착 예정으로 지구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는데 미국의 사정이 딱하니 세계도 덩달아 딱하다. 올린 대통령(메릴 스트립 분)이 중간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해 그 정보를 봉인해버린다.
거대혜성이 날아온다는 정보를 미 백악관이 감추자, 세계 모든 나라는 모두 '깜깜이' 상태가 된다. 올린 대통령은 자신의 스캔들을 덮으려고 비로소 '혜성위기'를 발표하지만 세계의 사정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모두 미국의 조치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연간 국방예산이 1000조원이어서 '천조국'이라 불리고 '우주방위사령부'까지 갖추고 있는 미국이 '어떻게 좀' 해주기를 믿는 듯하지만 올린 대통령의 백악관은 세계를 걱정하거나 우방을 배려할 생각이 '1'도 없다.
올린 대통령은 혜성을 파괴하는 대신 잘게 쪼개 혜성을 이루고 있다는 희토류를 추출하겠다는 도박을 감행하기로 한다. 인도, 러시아, 중국 등의 우주강국들이 국제공조를 제안하지만 미국은 단칼에 거절한다. 누구에게도 희토류를 한 줌도 나눠주고 싶지 않다.
아마 미국이 지구를 위협하는 디비아스키 혜성을 쪼개어 착륙시키기에 성공했다면 3000조원어치 희토류도 획득하고 차후에 세계 모든 나라의 팔을 비틀어서라도 어마어마한 '지구방위분담금'도 받아냈을 듯하다.
자유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에 주둔한다면서 어느날 갑자기 방위비 분담금을 2배 올리겠다고 눈을 부라리고, '죽음의 백조'라 불리는 핵전략폭격기 B-iB, 핵항모도 추가비용을 지불해야 보내겠다는 나라이니 능히 그럴 수도 있겠다.
애덤 매케이 감독이 보여주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세계를 수호하는 정의로운 국가의 모습은 아니다. 정의롭지 못하다고 '악마화'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게 '숭상崇尙'까지 할 나라도 아닌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대개 정의롭지 않은데 나라 사이의 관계라고 그다지 정의로울 리는 없다.
부강하고 인구가 몇억이 되는 나라든 인구 몇십만명의 가난한 나라든 모두 평등한 1표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가장 정의로운 유엔 총회는 유명무실화한 지 오래다. 모든 건 힘깨나 쓰는 강대국들의 상임이사국 회의가 결정한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이것도 성에 안 차는지 유엔 밖으로 뛰쳐나와 자기들끼리 G7이라는 회의체를 만들어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요리한다.
2015년 1만여명의 시위대가 독일에서 열렸던 G7 회담장을 둘러싸고 '모든 세계인들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결정들을 너희 일곱 나라가 내린다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라고 외쳤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영화 '내부자들(2015년)'에서 '철없는' 검사 우장훈(조승우 분)과 '철든' 깡패 안상구(이병헌 분)가 '정의'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대화 중에 무척이나 인상적인 대목이 하나 나온다. 검사 우장훈이 정의를 위해 안상구에게 내부고발자로 나서달라고 어린아이처럼 보챈다.
깡패 안상구의 대답이 어른스럽다. "정의? 세상에 그런 달달~한 것이 아직 남아 있었던가?" G7 수뇌들도 G7 회담장 밖에서 들리는 요란한 정의의 함성을 들었다면 안상구처럼 "정의? 세상에 그런 달달한 것이 아직 남아 있었던가?"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깡패 안상구의 말이 맞다. 특히나 국제관계에 정의라는 달달한 것이 사라진 지 꽤 오래됐다. 문헌상 기록으로는 무려 2500여년 전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BC 431~404년)' 때 이미 사라진 것으로 그리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기록한다.
스파르타와 패권경쟁을 하던 아테네는 주변의 작은 도시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회유하고 협박한다. 에게해의 작은 섬나라 멜로스(Melos)에도 항복을 하든지 정복을 당하든지 양자택일하라고 압박한다. 아테네의 사절에게 멜로스의 왕이 '우리의 의사를 무시하는 이런 일방적인 강요는 정의롭지 못하다'고 항변 겸 읍소한다.
아테네의 사절이 안상구처럼 냉소한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정의'라는 달달한 얘기는 서로 대등한 힘을 가졌을 때나 가능한 얘기다. 강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약자는 하기 싫은 것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아테네는 항복을 거부하는 멜로스를 침공해 남자는 몰살하고 여자와 아이는 모두 노예로 팔아버린다. 강자인 아테네는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고, 약자인 멜로스는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은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투키디데스는 그날을 '정의가 죽던 날'로 기록한다.
지난해 우리 대통령이 미국 국빈 방문길에 만찬장에서 돈 매클레인(Don McLean)의 '아메리칸 파이(American Pie)' 한 소절을 불러 화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돈 매클레인이 붙인 원래 곡명은 '음악이 죽던 날(The Day Music died)'이었다고 한다.
매우 은유적인 그 가사를 두고 설왕설래가 난무하자 돈 매클레인 본인이 자신의 본래 의도는 '미국 군산복합체(Military Industry Complex)의 수작질로 미국이 저지르는 정의롭지 못한 전쟁, 케네디와 마틴 루서 킹 목사,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에 이르는 1960년대 정의롭지 못한 암살 등을 후세들에게 일깨우려 한 노래'였다고 밝힘으로써 종결됐다.
음악이 죽던 날이라는 말은 결국 정의가 죽던 날의 은유적 표현이었던 모양이다. 젊은 시절 꽤나 진보적이었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애창곡이라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우리 대통령도 젊은 시절 애창했다는 것을 보면 우리 대통령도 젊은 시절 진보적인 정의파였는지도 모르겠다.
곧 다가올 11월 '정의가 죽어버린 나라'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바라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어쩌면 미국 유권자들보다 더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듯하다. 우리나라 사람들 60% 이상이 올린 대통령의 실사판과 같은 트럼프보다는 그나마 해리스가 당선되기를 원한다고 하는데 국제관계에 정의 같은 달달한 것이 이미 오래전 사라진 마당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큰 차이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경제와 안보에 있어 우리의 목줄을 쥐고 있다시피 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우리는 1표도 행사할 수 없으니 참으로 비민주적이고 정의롭지 못하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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