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한한 자유 아닌 ‘실패할 자유’ 소재로 흥행몰이
● 김정일 사망에 슬픔보다 걱정이 앞선 까닭
● 머리 1m 위로 날아간 총알 피해 탈주 성공
255만 명.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 대작도, 특수효과를 내세운 SF(Science Fiction·사이언스 픽션) 영화도 아닌 중급 영화가 기록한 누적 관객 수다. 7월 3일 개봉한 영화 ‘탈주’는 이제훈, 구교환 등 배우들의 빈틈없는 열연과 속도감 있는 추격 액션으로 폭발적 입소문과 N차 관람(특정 영화나 전시회를 여러 차례 보는 것)을 이끌어냈다. 개봉 10일 만에 누적 관객 수 100만 명을 넘어섰다. 올여름 개봉한 한국영화 중 최단기간 100만 관객 돌파라는 기록을 세웠다. ‘탈주’ 제작비는 여느 영화에 비해 적은 약 100억 원. 손익분기점(약 200만 명)을 여유 있게 넘기는 ‘대박’을 터뜨렸다. ‘탈주’는 이 기세를 몰아 8월 26일부터는 주문형 비디오(VOD) 서비스를 시작했다.
탈북을 소재로 한 작품 대다수가 자유에 대한 무한한 갈망으로 처절하게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반해 ‘탈주’는 실패할 자유를 소재로 한 점이 이채롭다. 북한 또는 탈북을 소재로 한 작품에 대중의 관심이 시들해질 즈음 충무로의 기존 문법을 깨고 관객을 사로잡은 것이기에 이 영화의 흥행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 한 관객은 “한국 사회는 실패하면 인생이 끝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되레 규남은 ‘실패하기 위해 남한에 간다’고 말한다. 이 대사가 뭉클하게 느껴졌다”고 평가했다.
영화 흥행 이후 정 씨의 탈북 과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그의 배우 활동도 덩달아 주목받고 있다. ‘탈주’는 탈북민 출신 배우의 영화 출연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정 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94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그는 국가대표 축구선수를 꿈꿨다. 그러나 부모의 권력과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꿈을 접고 2011년 군에 입대했다. 당시 그는 17세였다. 탈북을 소망하다 실행에 옮겨 대한민국 땅을 밟은 것은 2012년 8월. 한국에 정착한 지 5년 만에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국회 인턴, 선교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2021년에는 탈북민 유튜브 채널 ‘북시탈’을 개설해 유튜버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 채널에는 탈북민들이 출연해 북한 사회와 군대의 실상, 북한 젊은이 분위기를 담은 콘텐츠가 주를 이룬다. 북한군의 열악한 인권 실태를 알리고자 시작한 일이다.
초가을 무렵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만난 정 씨의 얼굴에는 대한민국에 사는 여느 청년에게서 느껴질 법한 풋풋함과 열정이 공존했다.
“‘탈주’가 제 인생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줬죠. 9월부터는 새로운 영화 촬영에 투입돼요. 한국에 와서 작성한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배우의 삶을 사는 것이었는데, 살면서 이 꿈을 이루게 될 줄이야…(웃음).”
‘탈주’는 북한군의 실체를 생생하게 다룬다. 북한군이 상의를 탈의한 채 뛰는 장면은 병사들이 식량난으로 영양실조에 걸려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이라는 설정이다. 반면 북한군 고위층이 술에 취해 규남에게 업혀 나오는 장면은 식량을 독식하는 고위층이 대다수 군인과 달리 얼마나 고영양, 고열량 식단을 섭취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현실은 영화보다 처참해요. 2011년 봄 훈련소에 도착했을 때 제 몸무게가 62㎏이었거든요. 부대에서 병사들에게 옥수수와 쌀이 7대 3 비율로 섞인 밥을 주는데, 그걸 먹고 나면 늘 허기가 졌어요. 누군가 ‘자고 나면 광대뼈가 솟구칠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을 실감하겠더라고요. 또 훈련은 얼마나 고되던지.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훈련받아야 했습니다. 3개월 훈련을 마친 뒤에는 체중이 45㎏으로 줄었더라고요. 저보다 2~3개월 먼저 입대한 신병 대다수가 영양실조에 걸려 좀비처럼 보였습니다.”
“정말 웃지 못할 얘긴데요. 과거에는 민경부대에 배치되려면 신병 훈련만 1년간 받으며 격술과 사격술을 연마해야 했어요. 그런데 제가 입대할 쯤에는 영양실조가 상대적으로 덜한 신병들이 가는 부대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당시 몸무게가 45㎏에 불과하던 제가 민경부대에 배치됐으니 말 다한 거죠. 신병들이 하도 허약해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픽픽 쓰러지니까 부대에서는 병사들을 살찌우게 하는 ‘보양소’라는 시설을 자체적으로 운영했어요. 3개월 정도 신병들에게 훈련을 하지 않고 먹이고 재우기만 하더라고요. 저도 보양소에 머물렀고요. 신병 일부가 보양소에 가 있으니 정예부대라던 민경부대라도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죠.”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2011년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현지 지도차 이동하던 열차 안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가 김 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확인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인 2012년 12월 19일이다.
김정일 사망 소식을 언제 어떻게 알았나요.
“북한 병사들도 2011년 12월 19일에야 그 소식을 접했어요. 그때 저는 보양소에 머물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모든 병사에게 중대 교양실로 모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지시는 드물기에 저를 포함한 병사 대부분이 어리둥절해 했죠. 그날 낮 12시 북한 조선중앙TV 특별방송에 검은색 한복을 입은 리춘희 아나운서가 나와 김정일 사망 소식을 흐느끼며 전했어요. 방송을 보고 나서야 ‘아, 지금은 울어야 하는구나’ 했죠.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짜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어요. 침을 손가락으로 찍어 눈에 바르며 주변 눈치를 봤죠.”
“슬픔보다는 걱정이 앞섰으니까요. 제가 김일성이 사망하던 1994년에 태어났거든요. 2011년 군에 입대했더니 그해 김정일이 사망했어요.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는데요. 너무 황당한 거예요.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통일은 물 건너가는 건가?’ 걱정이 되는 거죠. 김정은 후계 세습을 준비하던 2010년 북한은 인민들을 상대로 태양절 100주년(김일성 100번째 생일인 2012년 4월 15일)까지 조국을 통일하겠다고 선전했단 말이에요. 제가 군에 입대할 때 군 간부들이 “통일 병사가 될 것”이라며 세뇌했고요. 그런데 김정일이 죽었다고 하니까 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것 같았달까.”
김정일 사망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린 병사들이 실제로 있나요.
“중대 정치지도원(부대에서 정치적 임무를 담당하는 군인의 보직)요. 입당을 앞둔 고참들도 큰 소리로 울었죠.”
그 이후 노동당 선전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거나 기존에 가진 생각이 바뀐 게 있었나요.
“그렇진 않았어요. 17세에 통일 병사를 꿈꾸던 저에게 그 이상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고 봐요. 당에서 2012년 4월 15일까지 통일을 시킨다고 선전했으니까 그날까지 무슨 일이든 일어날 거라는 그런 생각? 막연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설령 통일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연다고 했으니 앞으로 무언가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때까지 군대에서 버티는 걸 목표로 삼았고요.”
시간이 흘러 2012년 4월 15일이 됐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제야 정 씨는 노동당의 선전을 믿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쯤 남한에서 보낸 삐라(대척 관계에 있는 나라의 민심을 동요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전단지)를 통해 한국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접했다.
“‘당신들이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전력 자원이 풍부해 수림이 무성하다’ ‘경제적으로 세계 10위 안에 손꼽히는 경제 강국이다’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어요. ‘대한민국으로 오라’는 내용도 있었고요. 사실 입대 전부터 한국이 잘사는 나라라는 건 한국 드라마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거든요. 삐라에 적힌 내용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했지만, 그것이 제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거예요. ‘당이 말하는 건 프로파간다(선전) 아닌가’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죠.”
그가 북한의 선전선동을 차츰 신뢰하지 않게 된 건 밤마다 감시대에 올라 눈앞에 펼쳐지는 철조망 너머 남쪽을 수놓은 화려한 불빛을 봤을 때다. DMZ 인근 경기 파주시 대성동 마을에 사는 남한 주민이 집에서 TV를 보는 모습을 목도한 뒤에는 삐라에 적힌 내용을 믿어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한다. 이후 그는 DMZ를 넘어 탈북하는 경로를 머릿속에 수차례 떠올리며 치밀하게 탈북 계획을 세웠다. 기회는 태풍과 함께 찾아왔다. 2012년 8월 말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카눈’으로 인해 DMZ 인근에 설치된 2200볼트 고압 전기 철책, 220볼트 전기 철조망, 가시철조망 등 3중 철책이 파괴된 것이다. 정 씨는 경계가 느슨한 정오쯤 수류탄 2발과 AK소총, 탄약 90발, 쌍안경을 챙겨 무너진 철책을 넘어섰다. 북한군 추격조에 잡힐 경우를 대비한 자폭용이었다. 2m 높이 갈대밭과 가시덩굴을 뚫고 총 18시간 행군 끝에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영화 속 규남은 북한군의 무차별 사격을 피해 갈대밭을 헤쳐 탈주에 성공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탈주 과정에 비슷한 상황이 있었나요.
“철책을 넘은 지 1시간쯤 됐을 때 선임이 저를 찾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산속에서 숨죽였다가 움직일 찰나에 북한군 초소에 발각된 거예요. 북한군 초소가 제 위치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약 70m 떨어져 있었나 봐요. 제가 움직일 때마다 같이 흔들리던 갈대를 향해 총을 쏴대더라고요. 갈대밭에 납작 엎드리자마자 한 발이 머리 위로 ‘피융’ 소리와 함께 지나가는 거예요. 제가 엎드린 바로 옆으로 총알이 박히기도 하고요. 산에서 내려오다 목함 지뢰를 밟았는데 다행히도 불발탄이었고요. 나중에 한국군으로부터 들으니 갈대밭에서 제 머리 1m 위로 날아간 총알을 포함해 모두 AK 총탄 12발이 쏟아졌다고 해요.”
일각에서는 DMZ를 거쳐 탈북에 성공한 과정에 의문을 표합니다.
“가끔 그런 질문을 받아요. 제 탈북 경로가 일반적인 탈북 경로와 굉장히 다르다고 알고 있어요. 이건 운이 좋아서가 아니죠. 신의 보호가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잖아요. 심지어 DMZ에는 맹수가 많은데 공격당하지도 않았고요. 제가 철책 넘을 때 북한군이 나를 향해 총을 쏘면 나도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눠 핏값이라도 하고 죽겠다는 마음을 먹었거든요.”
“이종필 감독님이 북한 관련 영화에는 북한 말투가 정형화돼 있다며 현실 그대로 풀어내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1년 6개월 정도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에게 북한군 말투를 가르치면서 이거 어색하다, 저거 어색하다 이런 식으로 짚어줬어요.”
이제훈 배우의 연기를 어떻게 봤나요.
“연기를 너무 잘하더라고요. 특히 인상적이었던 게 애드리브 연기였어요. 사실 저와는 상관없을 수 있지만 ‘이럴 땐 이렇게 애드리브를 섞어도 되냐’ 하고 저에게 의견을 구하는 모습을 보며 연기 열정과 노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뭔가요.
“규남이 감시대에 올라 전방(남한)을 바라보는 장면요. 밝은 불빛이 대한민국의 밤하늘을 수놓는 모습을 스크린에서 보는데, 순간 울컥하는 거예요. 12년 전 남쪽을 바라보던 제 모습이 겹쳐 보여서요. ‘그토록 가깝게 느껴졌지만 쉽게 갈 수 없던 남한에 내가 진짜 왔구나’ 하고 또다시 실감하게 됩니다.”
인터뷰 말미에 정씨는 DMZ의 감시 경계가 삼엄하긴 하지만 앞으로도 자신처럼 자유를 찾아 DMZ를 넘어오는 북한 병사의 탈주가 잇따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 최전방 지역에서 이뤄진 유해발굴감식 현장에 갔다가 대북 확성기 방송을 들었다. 이 방송을 통해 젊은 북한 군인과 주민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리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 순간에도 군사분계선에서 근무를 서고 있을 북한 군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그곳에서는 남한으로 넘어오고 싶어도 내색할 수 없잖아요. 그럼에도 저마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자유를 찾아 탈주하고 싶다는 마음을 조용히 품고 있겠죠. 그 소망을 버리지 않으면 좋겠어요. 죽기를 각오하고 앞으로도 DMZ를 넘어오는 탈주자가 계속 있을 거라고 봐요. ‘탈주’ 영화가 기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