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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중세의 사상/스콜라 철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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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 철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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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ola 哲學-展開

안셀무스 등의 선구적 활동에 의해 준비된 스콜라 철학은 12세기의 논리만능, 인문주의, 신비사상의 물결을 따라 촉진되어, 13세기에는 발전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중세문화의 최성기, 중세사조의 원숙기를 이루었다.

그리스도교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결정적으로 수용(受容)한 것은 이 발전에 일관하는 중심적 원동력이 되었다. 이를 확립시킨 요인으로서 대학의 성립,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의 창립,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아라비아 철학(이슬람 철학)과의 접촉은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교사 아벨라르두스가 편력하는 곳마다 학생이 모여들어 학원을 이루던 12세기가 지나고, 13세기에는 파리·옥스퍼드에 의해 대표되는 교사와 학생의 길드적 단체인 대학이 새 교육체제와 특권을 갖고 고정화되었다. 강의와 토론이라는 주요 교수 방식이 채택되고 교수 자격도 규정되었다. 그 무렵 출현한 2대 탁발수도회 수도사가 대학의 조직을 유지하는 요원으로 일하였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물결은 아라비아와 유대의 철학자를 거쳐 유럽으로 밀려왔고, 그리스 원전의 직접 번역과 함께 일세를 풍미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전모를 알게 된 유럽 사상계는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이 대결을 통해 스콜라 철학은 전개되었으며 프란시스코회 학파와 도미니코회 학파는 자웅을 다투었다.

프란체스코회 학파(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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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sco會學派(前期)

많은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아라비아 및 유대 철학의 이론을 받아들였으나, 종자적 원리(種子的原理)나 조명설(照明說)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지켜 보수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헬즈의 알렉산데르(1170경-1245)는 <신학대전(神學大全)>을 썼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전체를 이해하여 교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보나벤투라는 경험적 자연인식설을 인정하면서, 그 바탕 위에서 신적 조명설을 주장, 신과의 직접적 일치를 말하는 신비주의를 주장하였다.

한편 옥스퍼드의 로저 베이컨 등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오히려 아라비아 자연과학자들의 광학사상(光學思想)을 받아들였다.

도미니크회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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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ic會學派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전체를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에 받아들이고, 이 철학 체계 위에서 아우구스티누스적 신학의 전통을 지킨 중도파(中道派)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의 보수파와 아베로에스파의 급진파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 대(大)알베르투스(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당대 모든 신지식을 그리스도교에 받아들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전체를 그리스도교화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결정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리스도교와의 대화를 확립하였다.

프란체스코회 학파(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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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sco會學派(後期)

둔스 스코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대결하며 그의 사상을 전개시켰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전면에 내세우며 풍요한 문제의식을 갖고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와의 종합을 시도하였는데, 그는 성기(盛期) 스콜라 철학과 후기 스콜라 철학과의 경계에 위치한다.

옥스퍼드의 수학적 과학정신과 프란체스코회적 아우구스티누스 주의로부터 이중적 영향을 받으며 토마스 체계의 논증에 대해 엄밀한 척도를 적용하여 가장 깊은 관점으로부터 보정(補正)하도록 하였다. 그가 인용한 겐트의 헨리는 토마스의 주지주의(主知主義)를 배격하고 의지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질료(質料)를 개별화의 원리로 보지 않고 존재와 본질의 실재적 구별을 부정하였다. 이와 같은 화려한 전개도 13세기 말이 되면 사회붕괴 현상의 물결에 휩쓸린다. 권위에 의한 통일도 스콜라 체계도 불신당하고, 신비주의적 경향, 유명론적(唯名論的) 경향이 강화된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나 월리엄 오컴의 유명론에서 볼 수 있는 근대정신의 싹은 이윽고 근세철학, 자연과학에의 길을 개척하고 근대적 자아(自我)를 탄생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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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oteles 硏究

13세기의 스콜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의 대결을 통해 전개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재발견이 그리스도교 세계에 던진 파문의 의의는 매우 크다. 철학 자체 안에 감추어진 방법론이나 이교적(異敎的) 세계 해석이 문제가 될 뿐 아니라 재발견의 경로가 된 아라비아 철학자의 주석과의 혼동도 문제를 야기시켰다. 곧 두 개 세계관과의 대결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에 수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교적 요소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12세기 중기에 발견된 논리학에 이어 아라비아어로부터의 번역으로 자연학이, 그리스어로부터의 번역으로 형이상학이 들어와 파리에서 읽혀졌다.

회교적(回敎的) 아리스토텔레스 주의 대표자들의 철학은 교의와 모순되는 점이 많았기 때문에 위험시되고 자연학, 형이상학 관계 저작의 주해를 가르치는 것은 1210년에 재삼 금지령을 받았다. 위원회의 검토로 오류를 제거하기 위해 교수가 금지되었지만, 오류 제거를 위해서는 내용 연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베르뉴의 윌리엄(1180경-1249)은 지상세계의 설명에 자연학이 탁월함을 인정하는 한편, 아라비아 철학자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헬즈의 알렉산데르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전체를 알아 교의 확립에 기여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교의와 상충하는 주석으로서는 아비켄나의 우주의 영원성이나 능동지성(能動知性)의 유일성, 아베로에스의 이중진리(二重眞理) 등이 지적된다. 유대의 철학자 마이모니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 주의의 영향을 받아 학문적인 유대 신학을 총결산하여 그리스도교 사상가에게 현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모색과 탐구의 결과, 13세기에는 모르베카의 윌리엄(1215-1286경) 등에 의해 주요 저작 전체가 그리스어 원전으로부터 번역되어 바른 이해를 얻게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하는 스콜라 신학자들의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로, 그리스도교적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의 건전한 토착화(土着化)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366년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리첸티아 지원자의 의무가 되기까지 했다.

보나벤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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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aventura, 본명 Giovanni di Fidanza (1221-1274)

이탈리아의 스콜라 신학자. 천사적 박사(天使的博士)라고 불리며 프란체스코 수도회 총회장, 오스티아의 사교 및 추기경이 되었다.

<영혼의 신을 향한 여행>은 그의 사상을 잘 나타낸다. '작은 빈자(貧者)'(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정신을 풍부한 학식과 표현력을 빌려 체계적으로 서술하였다. 중세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의 정화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충분히 이용하면서 플라톤적 색채로 스콜라 신학의 종합적 체계를 조직하였다. 인식론에서는 추상설(抽象說)과 조명설(照明說)의 종합에 힘썼고, 안셀무스 이래의 신비주의(神秘主義)에 충실하였으며, <디오니시오스 위서(僞書)>에 정통하였다. 산 실재(實在)를 희생시키는 추상철학(抽象哲學)으로 흐르지 않고 구체적인 것을 다루므로 그의 철학은 자기충족적(自己充足的)인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철학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철학자 보나벤투라의 그리스도교적 철학개념이 탄생하였다. 단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내적(內的) 빛의 조명을 받으며 신성성(神聖性)·완전성(完全性)에 있어서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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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us Magnus(1193경-1280)독일의 신학자·철학자·자연과학자.

파리와 쾰른에서 가르치고 레겐스부르크의 사교가 되었다. 도미니크회의 중심인물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스콜라 철학을 완성시켰다. 대(大)알베르투스, 보편적 박사(普遍的 博士)라고 불린다. 폭넓은 지식과 학문 영역의 보편성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붙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아라비아·유대적, 신플라톤 주의적, 교부학적(敎父學的) 저술가들로부터 방대한 사상 자료를 수집하여 당시의 철학 전반, 사변신학(思辨神學), 성서해석 및 자연과학 등 전 분야에 걸쳐 저술활동을 하였다.

여러가지 학문의 모든 부분을 라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이상으로 하여, 단순한 번역에 그치지 않고 원전의 결함을 보충하며 독창적 태도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스콜라 철학의 종합적 체계를 구축하였다.

철학적 사색, 자연의 귀납적 연구 등에서 권리만을 주장하지 않고 그 기초를 놓았으며, 신앙이나 신학의 경계를 명백히 하였다. 수집가로서는 자연과학 분야에서 날카로운 관찰과 실험으로 독창적 연구를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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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Aquinas (1225/27-1274)이탈리아의 신학자·철학자.

중세 스콜라 철학의 완성자로 천사적 박사라고 불렸다. 몬테카시노와 나폴리에서 교육을 받고 도미니크회에 가입하였다. 파리와 쾰른에서 대알베르투스에게 사사하고 파리, 로마, 나폴리에서 철학과 신학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며 저작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전체가 유럽에 알려져서 사상계가 이 새로운 이교(異敎) 철학과 대결해야 했던 시대에 활약하였다. 대알베르투스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중히 검토하며 받아들여 그리스도교적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를 대성시켰다. 철학사상,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이러한 수용(受容)은 바로 이성의 자율성의 승인, 자연 긍정의 정신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할 때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완성시킨다"는 태도를 갖고 은총과 자연, 신앙과 이성 사이에 조화로운 통일을 부여했다. 그의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전 자연은 신이 창조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고상한 부분이므로 인간이 자연 전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신의 존재를 추론(推論)하는 것은 신을 찬미하는 길인 것이다.

우선 그의 존재론(存在論)은 신학 전체의 특징을 이루는 것으로 실재적 색채가 강하다. 신과 피조물(被造物)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는 '존재의 유비(類比)'를 사용하여 유비와 참여의 개념에 의해 동일성 안에 차별을 갖고 있는 존재의 파악을 가능케 하여 불가지론(不可知論)과 범신론(汎神論)의 위험을 피하였다. 본질구조(本質構造)의 규정원리(規定原理)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質料)와 형상(形相), 가능태(可能態)와 현실태(現實態)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더욱이 아비켄나에게서 발견한 '본질과 존재'의 구별을 이용, 그의 독자적 원리를 전개하고, 본질과 존재가 일치하는 신(神) 존재의 필연성,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관념을 확립하였다.

신의 존재증명에는 본체론적(本體論的) 증명을 피하고, 경험에 의해 주어진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제1원인인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섯 가지 증명법을 사용한다. 악의 문제는 선의 결여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다음에 인격의 단일성을 믿는 그는 영혼의 유일형상성(唯一形相性)에 바탕을 둔 인간학을 전재한다. 이성적 동물로서 영과 육의 합성체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영혼에는 이성작용(理性作用)과 의지작용(意志作用)이 있으며, 영혼은 이성적 인식작용의 원리일 뿐 아니라 동물적·식물적 생명원리도 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인식론은 본질적으로 존재론적인데 이성은 감각이 주는 내용으로부터 추상작용에 의해 대상의 본질개념을 형성한다고 주장하고 능동지성(能動知性)과 수동지성(受動知性)을 구별한다. 도덕론에서는 모든 도덕은 신을 향하는 이성과 피조물의 운동이라고 파악하므로 종국적인 목표는 피안에 있어서의 신직관(神直觀)이 된다. 여기에 인도하는 수단으로서 윤리적 행위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

도덕률을 영원법의 반영이라 보고 초자연적 신에 입각하여 신을 향하는 목적론적 존재론의 체계 안에서 파악한다. 따라서 초월적인 것인 동시에 자연의 이성의 소리가 된다. 이성에 복종하는 습성으로서의 덕에는 세 윤리덕(倫理德-正義·節制·勇氣)에 사려(思慮)의 덕을 추가하고, 그 위에 은총에 의한 신학적 덕(信望愛)을 추가한다. 그중에도 사랑이 여러 덕의 형상으로서 인격의 최종적 완성을 이루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연법에 기초를 둔 사회철학·정치철학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요컨대 그의 사상체계는 자연과 초자연(超自然)과의 긴장을 인정하면서 각기 그 위치를 차지하게 하는 훌륭한 종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신학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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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大全 (1265-1273)

숨마(大全)라는 명칭은 12세기의 스콜라 용어에서 시작된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제시할 목적으로 편찬된 여러 학설의 전체적·체계적 집대성을 말한다. 성 빅토르의 후고에 의한 숨마가 최초의 전형.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가장 완성된 대표적 작품. 페투르스 롬바르두스(1164 사망)에서 전형을 볼 수 있는 <신학명제집(神學命題集)>의 방법(성서나 교부 등의 저서 중에서 신학관계의 중요한 견해(센텐티아)를 모아서 변증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더욱 발전시켜, 철학·논리·정치·경제 등 인간에 관련되는 모든 지식을 유기적으로 구성하고 신앙의 빛에 비추어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종합적 노작이다.

<신학대전>은 중세 대학의 교육활동에서 생긴 것으로, 신학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내용을 교육적 효과가 있도록 집약한 것이다. 13세기의 숨마는 다음의 세 목적을 갖고 있다. ⑴ 주어진 학문영역에 관한 지식의 에센스를 집약한다, ⑵ 단편적 분석을 넘어 여러 대상을 유기적으로 체계화한다, ⑶ 학생의 교육에 그 목적을 적응시킨다. 이러한 목적을 갖고서 현실생활을 긍정한 이 신학적 사상 체계는 중세 성기(盛期)에 국가까지도 복종시키는 세속적 권력을 가졌던 로마 교회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3부로 구성되며 6백여 문제, 3천여 항목을 포함하고 있다. 제1부(신)와 제2부(인간)는 이탈리아에서의 교수시대(1265-68)와 파리 체재시대(1269-72)에 완성, 제3부(그리스도)는 다시 이탈리아에 돌아와 살던 시대(1272-73)에 썼으나, 미완성인 채 병사하여 제자인 피페르노의 레기날도가 '보유(補遺)'로 완결시켰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각부에 많은 문제를 세우고, 각 문제를 몇 개의 항목으로 나누었다. 또 각 항목을 이론(異論), 반대이론(反對異論), 주문(主文), 이론해답(異論解答)으로 구성하였다. 곧 스콜라학의 논증법(論證法)에 따라 우선 자기의 주장과 다른 주장을 말하고, 다음에는 이에 반대하는 주장을 말하고, 끝으로 자기의 주장을 말하여 그 이유를 설명한다. 내용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그리스 사상과 교부들의 그리스도교 사상을 종합한 대작이다.

라틴 아베로에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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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tin Averro

s 派

13세기 후반, 아베로에스의 사상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접근하고 이성에 따라 사유된 결과는 비록 신앙적인 계시의 결과와 다르다 하더라도 이를 철학상의 사유 결과로 인정하려는 학파를 말한다.

대표적 철학자는 다키아의 보에티우스나 브라반의 시게르(1282 사망) 등 파리 대학의 인문학 교수들로서 특히 시게르는 성 토마스로부터 격심한 공격을 받아 1270년과 1277년에 이단 선고를 받았다. 그는 신앙의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신앙의 진리와 이성의 논증의 양립을 인정하려 한 점에서 이중진리설(二重眞理說)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또 이 세계는 과거·미래를 통해 영원하며 개개의 현상은 무한히 재생된다고 하였고,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단 하나의 지성이 존재할 뿐이라고 하여 개인의 영혼 불멸을 부정하였다. 이 점이 이단으로 몰린 점이지만, 이성을 존중하는 아베로에스 주의는 후에 더욱 대담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반아베로에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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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AVerro

s 派

아베로에스의 합리주의에 반대하고, 정통 그리스도교 옹호의 기치를 들고 신학과 철학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중심인물은 라이문두스 룰루스(1235-1316)이다.

그는 이슬람교를 논파할 목적으로 4백 편의 논설을 썼으며, 이교도 교화를 위해 이슬람어를 가르치는 대학을 세우려 하였다. 또한 스스로 이교도를 개종시키기 위해 북아프리카에서 포교활동을 폈으나 귀국 도중 살해되었다. 그의 출신국이 에스파냐이라는 점은 뿌리깊은 반 이슬람, 반 아베로에스와 관련이 있다.

그는 모든 원리를 일곱 개의 원(円)에 써 넣고, 동일한 중심에 회전시켜 모든 원리의 결합관계를 그림으로 이해시키려 하였다. 이 '룰루스의 방법'은 후에 라이프니츠의 결합술(結合術)에 영향을 미쳤다.

둔스 스코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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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s Scotus (1266/74-1308)

영국(스코틀랜드)의 스콜라 철학자.

성 프란체스코회에 가입하고 옥스퍼드에서 배웠으며, 학업을 마친 다음에는 그곳에서 교편을 잡았고, 1305년부터는 파리에서 가르쳤으며, 1308년 쾰른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일어난 새로운 자연 연구의 영향과 프란체스코회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아 토마스 주의에 반대하고 중세철학을 점차 르네상스로 인도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우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에 대한 존재의 논증을 비판하여 본래 논증은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이끌어내야 하는데 거꾸로 결과로부터 원인을 증명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의 증명은 이성적인 논증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성의 논증을 행하는 철학과 계시에 바탕을 두는 신학을 가르는 길이 열렸다.

또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의 개별성을 존중하여 개별성이야말로 사물의 본질을 완성시키는 최종적 요소라고 하였다. 현실에 있어서는 보편성과 개별성이 동등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하여 종래의 보편성 우위에 반대하고 개별성의 입장을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렸다. 이것은 후에 오컴에 의한 개별성 우위의 사상으로 발전한다. 지성과 의지의 관계에 대해서는 직관(直觀)의 인식을 중요시하여 의지의 우위를 말하고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인식을 존중하였다. 그의 논법은 미세한 점까지 파고들었으므로 정묘박사(精妙博士)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그의 독창적 사고는 스콜라 철학에 머무르면서도 토마스 주의를 비판하여 새로운 철학의 길을 준비하였다.

유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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唯名論

중세 초기부터 보편(普遍)과 개체(個體)의 관계에 대해 실념론(實念論, Realism)과 유명론(Nominalism)의 대결이 있었다. 보편이 우선해서 존재한다고 하는 실념론에 대해 개체가 우선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명론이다.

처음으로 유명론을 주장한 사람은 로스켈리누스였다. 그 후 주류를 이룬 실념론에 대항하여 다시 유명론을 내세워서 스콜라

철학에 도전한 사람은 페트루스 아우레오루스(1322 사망)나 뒤랑 드 상 푸루상(1270경-1344)이었다. 페트루스는 개체는 언제나 지각(知覺)의 대상이라 하였고, 또한 뒤랑은 이성에 의존하는 것이 권위에 의존하는 것보다 옳다고 하였다.

이러한 경향을 대성하여 유명론을 실념론과 대비되는 하나의 큰 학파로 형성시킨 사람은 오컴이었다. 그는 영국인 특유의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그 무렵 옥스퍼드에 일어난 과학적 연구를 신학·철학에 응용하여 새로운 경험과학의 길을 열었다. 그에 의하면 참된 명제는 직접 명료하게 증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 반하여 추상적 인식은 그 대상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지 못한다. 확인되는 것은 특수한 개체의 인식뿐이다. 따라서 보편은 개념 또는 소리에 지나지 않고 실재하는 것은 개체뿐이다. 이것은 로저 베이컨의 원리가 철학적으로 전개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를 계승한 것은 아담 워담(1358 사망), 미르쿠루의 존(1347경, 이단으로 되었다) 등이다. 그중에도 오트르쿠르의 니콜라우스(1350 이후 사망)는 모순율(矛盾律)만이 확실한 기본원칙이며 5관의 판단인 경험에 의해 인식되는 것 이외에는 긍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자연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의 이론을 버리고 아톰설을 택했다. 뷔리당(1300 이전-1358 이후)은 오컴 주의를 신봉하여 자연 연구에 종사했고 타성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근대 역학(力學)의 개조이다. 최후의 스콜라 학자 가브리엘 빌(1418경-1495)은 유물론을 쉽게 해설하여 멜란히톤 및 루터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이 하여 유명론은 스콜라학의 벽을 뚫고 근대과학·근대사상의 길을 준비했다.

오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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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William of Occam (1300경-1349경)

영국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활약했고 뮌헨에서 죽은 것으로 추측되는 중세 말기의 유명론 학자.

사리주(州)의 오컴 마을에서 태어났으므로 마을 이름을 따서 부른다. 프란체스코회에 속하고 옥스퍼드에서 배웠으나 파리에서 교편을 잡았고, 당시 세상을 시끄럽게 하던 교황권(敎皇權)과 세속권(世俗權)의 싸움에 흥미를 갖고 세속권을 지지하였다. 그 때까지 쓴 <명제집(命題集)>의 내용에 관해 교황청의 심문을 받았고 아비뇽에 호출당했으며, 1326년 그의 학설은 이단 선고를 받았다. 2년 후 교황청의 추구를 피해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1290경-1342)와 마찬가지로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4세 밑으로 도피하여 보호를 요청했다. "당신은 칼로 나를 지켜주십시오. 나는 펜으로 당신을 지키겠습니다"라 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에도 그는 교황을 공격하는 글을 몇 편 발표하였다.

그는 '좋은 공동사회' 건설이야말로 군주의 의무라 하고, 그렇지 못한 독재자를 죽이는 권리를 국민이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교회에 관해서는 탁발승단(托鉢僧團)과 같은 완전한 무소유가 이상이라고 말하며 교황을 비난했다. 그의 철학상 업적은 유명론의 혁신으로 추상적인 것은 사유 속에 개념으로 존재하는 데 지나지 않고 실재하는 것은 인식되는 개체뿐이라고 하였다. 다만 신앙에는 다른 진리가 있으며, 이러한 면에서는 신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신은 노새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하며, 신의 지배하에서는 비합리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성과 신앙의 분리는 근대사상에의 길을 열었다.

신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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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秘主義

신비란 이성을 초월한 숭고한 어떤 것을 말한다. 광의로는 신비적 체험을 표현하는 종교사상을

총칭하지만, 협의로는 14세기 독일의 에크하르트로부터 시작되는 종교사상가들의 사상을 말한다.

이러한 사상가들에 있어서는 신비는 직접 감각적으로 신과 일체가 되는 것을 말하며 이 때 더없는 황홀감을 맛보고 신을 가까이 육신으로 알게 되며 몰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유럽에서는 플로티노스(205-269/70)에서 시작되었고 <디오니시오스 위서(僞書)>에 의해 전파되었으며, 성 프란체스코의 체험에 생생하게 나타나고 에크하르트에 이르러 독특한 사상이 되었다. 이어 조이제(1295-1366)나 타울러(1300경-1361) 등 신비사상가들에게 계승되어, 벨기에의 로이스부르크(1293-1381)에 이르러서는 굶주린 신에게 먹힌다는 특수한 일체관(一體觀)을 말했다. 가톨릭의 정통신앙에 입각하는 제르송(1363-1429)도 여러 학파의 절충을 바라면서 신비적 직관에서 내적(內的) 생명을 구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결코 명상이나 개인적 도취에만 그친 것은 아니며, 실천활동을 중시하여 개혁운동과도 관련이 있었다. 11세기 코뮌의 자치권 요구 폭동에서는 클뤼니 개혁파의 신비적 설교자가 선두에 섰다. 성 프란체스코로부터 시작되는 탁발승단은 교회에 대한 무언의 개혁운동이었다.

토마스 아 켐피스를 낳은 네덜란드의 '공동생활의 형제회(兄弟會)'도 세속적 활동을 중시하는 신비주의였다. 14세기라는 불행한 시대에 민중은 에크하르트의 복종하라는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때로는 빈곤과 평등의 이상에 불탔다.

에크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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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es Eckhart (1260경-1327)

독일의 신비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고 통칭된다. 튀링겐의 고타에 가까운 호흐하임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도미니크회에 가입하고 쾰른의 동회의 학교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배웠다. 파리로 가서 프란체스코회와의 논쟁에서 명성을 얻고, 1302년 파리 대학으로부터 마기스테르의 칭호를 허용받았다. 1304년에 작센의 도미니크회 관구장(官區長)이 되었으나 다시 파리로 돌아와 <3부작(三部作)>을 썼다. 1313년 슈트라스부르크로 돌아와 설교에 전념하였으나 프란체스코회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관상(觀想)으로부터 출발하여 정적(靜寂)과 무(無)의 경지에 철저하였으며 신과의 합일(合一)을 생각했다. 신은 이성으로도 감각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한 황야이며 무한 자체이다. 여기에서 신은 페르소나(神格)을 초월한 신, 곧 '신성(神性)'으로서 모든 특징을 통합 해소한다. 이러한 신에게 몰입할 때 핵심이 되는 것이 인간의 영혼의 '작은 불꽃'이며 영혼의 성(城)이다. 자기를 무(無)로 돌려 신의 무와 합일하면 비로소 인간은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드디어는 신까지도 버리고 최고의 덕을 달성한다. 이러한 정신의 자유에 대한 이론이 후에 신플라톤 주의나 루터에게 영향을 미쳤다.

신의 위안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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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慰安-書 (1308-1314 이후)

에크하르트의 저서. 헝가리의 공주 아그네스(1280경-1364)가 부왕 알브레히트의 죽음(1308)과 어머니의 죽음(1314)을 맞아 슬퍼하는 것을 위안하려고 썼다.

서문과 본문의 3장으로 되어 있고, 그리스도교적 인생의 지혜를 가르치고 슬픔을 극복하는 내용이다. 제1장에서는 '어떠한 괴로움에도 위안을 주는 진리'를 말한다. 신성(神性)과 신이 구별되듯이 정의와 의인(義人)에도 구별이 있으며, 신이 신성의 아들인 것처럼 의인은 정의의 아들이다. 의인은 모든 것이 정의로부터, 곧 신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어떠한 일에도 놀라지 않는다. 신이야말로 참된 진실, 완전한 안식인 것이다.

제2장에서는 30가지 교훈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떨어뜨린 돈에 미련을 두지 말고 남은 돈을 생각하고 마음을 달래라. 병에 걸려도 간호해 주는 가족이나 벗은 커다란 위안이다. 이 세상의 사라져 버리는 것을 위해 슬퍼하는 것은 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세네카는 괴로워하는 사람에 대한 최상의 위안으로서 그 모든 결과를 자기가 바란 것, 아니 오히려 자기가 그렇게 되라고 기도한 것이 실현된 것으로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더욱 깊이 생각해서 참된 진리는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난다고 말한다. 괴로움을 인내해 보아야 참된 환희를 알고, 자기를 넘어 신과 합일할 때에만 참으로 모든 괴로움은 승화된다. 최상의 위안은 신도 내가 괴로워할 때 옆에 서서 나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에서 말하려는 요점이다. 제3장은 이에 대해 사례를 들고 끝맺는다.

토마스 아 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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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a Kempis (1380경-1471)독일의 신비사상가.

라인 하류의 켐펜에서 태어나, 92년 동안의 일생을 거의 츠볼레에 가까운 아그네텐베르크 수도원에서 보냈다. 여기서는 네덜란드의 신비사상가 하르트 프로테(1340-84) 및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베인스(1350-1400)가 창설한 '공동생활의 형제회'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토마스 아 켐피스도 이 회에 가담하여 모범적인 경건한 생활을 보냈다.

이 회는 속세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수도적인 청빈·정결·복종의 생활을 보내도록 노력하고 재산은 공유이며, 스스로의 노동으로 그날그날의 양식을 벌었다. 일은 사본(寫本) 및 인쇄·제본과 교육으로, 특히 연소자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에 에라스무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1401-1464) 등을 배출했다.

그들은 프란체스코회와는 달라서 자신의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신비주의의 조용한 실천활동이 강조되고 있다. 그보다 더 경건한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들은 토마스 아 켐피스는, 1425년 이후 부원장으로서 후진 지도에 진력했다. 그래서 후진 지도를 위한 지도서를 몇 가지 썼는데, 그중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널리 애독되어 신앙의 귀감, 정신의 양식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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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초기의 작품. 중세 말기 네덜란드의 데벤테르에 있던 재속수도회(在俗修道會) '공동생활의 형제회'의 신앙생활 지침으로 쓰여졌다.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일부에서는 이 회의 사상적 지도자인 프로테가 실제 저자라고도 한다. 후세에 오랫동안 그리스도 교도의 마음의 양식으로서 애독된 이 책은 4권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제1권 '영적 생활에 필요한 교훈', 제2권 '내적인 것에 관한 교훈', 제3권 '내면적인 위안에 대하여', 제4권 '제단(祭壇)의 비적(秘蹟)에 대하여' 등이다. 그중 제4권은 기도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울림은 신비적 음악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전체에 일관하는 테마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세상의 모든 허망한 것을 가볍게 여기며 살기를 권하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고 신만을 섬기는 것, 그 이외에는 덧없고 덧없는 것, 모두가 공허한 것이다." 그 생활방식은 경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지식을 갈구한다. 그러나 신을 외경하지 않는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참으로 신을 섬기는 비천한 촌부(村夫)가 자기 자신을 소홀히 하고 천체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방자한 철학자보다 나은 것이다." "가능한 한 사람이 모여서 떠드는 곳을 피하라. 세상적인 사건을 논평하는 것은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곧 허영에 더럽혀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생활의 권유에는 담담한 우수의 감정까지 깃들여 있으나, 은밀한 충족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근세 자연철학의 선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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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世自然哲學-先驅者-17세기의 수학적 자연과학과 철학에서 완전히 전개된 근세 자연과학 사상은 이미 13세기 옥스퍼드 학자들과 14세기 파리 학자들에게서 그 선구적인 싹을 찾아볼 수 있다.

옥스퍼드 대학은 샤르트르 학파적 자연연구의 유산과 신플라톤 주의에 침투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가르치고, 아라비아 광학(光學)의 영향을 받아 수학적 자연과학과 실험과학의 방법을 확립하였다. "머리는 거대하고 정신은 치밀하다"고 일컬어진 그로스테스트(1175경-1253)는 빛의 형이상학을 체계화하고 빛의 질료적(質料的) 관념에 착안했다. 그 의의는 중대하며, 그 일관된 과학정신 및 방법론은 데카르트의 선구가 되었다.

로저 베이컨은 일체의 자연현상을 양(量)과 수(數)로 환원하여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스승의 가르침을 발전시키고, <자기론(磁氣論)>의 저자 마리쿠르의 페트루스 페레그리누스의 실험적 방법을 채택하여 실험과학을 수립함으로써 프랜시스 베이컨의 선구가 되었다. 그 외에 <원근법(遠近法)>의 저자 비테로(1230경-1275경)나

무지개의 현상을 논한 프라이베르크의 테오도리크 등도 주목된다.

파리에서는 관찰가로 경험을 중시한 대알베르투스나 14세기의 과학적 오컴 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이 주는 속박을 깨고 근대적 역학(力學)과 천체이론(天體理論)을 개척했다. 장 뷔리당(1300 이전-1358 이후)과 알베르트 폰 작센(1316경-1390)은 갈릴레이의 약동(躍動)이나 데카르트의 운동량(運動量)에 가까운 개념에까지 도달하였다. 오레스므의 니콜라우스(1382 사망)는 갈릴레이의 낙체(落體)의 법칙이나 데카르트의 해석기하(解析幾何)의 원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 등의 선구가 되었다.

베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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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Roger Bacon (1214경-1294경)

영국의 철학자·자연과학자.

경이적 박사(驚異的博士)라고 불렸다. 서머세시아의 일체스터에서 탄생. 옥스퍼드 대학에서 그로스테스트로부터 수학의 중요성을 배우고, 파리 대학에서 '실험의 스승' 페트루스 페레그리누스로부터 경험의 중요성을 배웠다. 귀국 후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되어 옥스퍼드에서 가르쳤으나 의혹과 박해, 이단선고와 투옥 등 곤경을 겪었다.

실험과학을 중시하고 원전연구를 위한 여러 언어의 습득을 역설했으나 최고의 학문은 역시 신학이었다. 여러 학문은 성서에 포함된 유일하고 완벽한 예지를 발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의 신학적 입장은 아우구스티누스 이래의 전통에 따른다. 지식의 원천으로서 추리(推理)·논증보다 관찰과 실험을 중요시한 점은 높이 평가된다. 백과전서적인 경향을 가졌으나, 아라비아 광학의 영향을 받아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외(圈外)에 선 독특한 스콜라학을 세웠다. 수학적 자연관과, '실험과학'(그가 처음으로 이 말을 사용하였다)의 방법에 의한 자연과학의 근대화를 이룬 공은 매우 크다.

권위에 대해 자유를 요구하는 예리하고 격렬한 공격 때문에 생전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직 교황 클레멘스 4세의 보호를 받아 평온한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고, <대저작(大著作)>(1233), <소저작(小著作)> <제3저작>의 완성을 보았다. 문법·논리·수학·물리·언어 관계의 논문이 수록되었으며, 그의 지리학은 이탈리아의 항해가 콜럼버스(1415경-1506)도 읽었다.

르네상스기의 스콜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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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aissance 期-Schola 哲學중세 말기에 일시 쇠퇴했던 스콜라 철학은 16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에서 부흥의 징후를 보이는 등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고 하였다.

경험과학의 진리나 신교의 주장 등 새로운 견해를 스콜라 철학의 체계에 받아들이는 태도는 일찍이 신앙과 이성의 통일을 본질로 하는 스콜라 철학의 본디 면모였다. 이탈리아의 카예타누스(1469-1534)는 파도바 대학에서 형이상학을 가르치며 같은 대학에서 아베로에스설을 신봉하는 폼포나치를 공격했다.

에스파냐에서는 제수이트회의 폰세카(1528-1599)가 은총과 자유의지의 화해를 주장하고, 제자 모리나(1535-1600)도 같은 주장을 해서 스승보다 더 유명해졌다. 모리나의 주장과 토미즘을 조화시키려고 한 것이 수아레스이다. 그의 설은 제설종합(諸說綜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합은 용이하지 않아 단지 절충했을 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스콜라 철학의 전통은 지켜지고 근세에 계승되었다.

수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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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Suarez (1548-1617)

에스파냐의 신(新)스콜라학의 대표적 철학자.

우수박사(優秀博士). 그라나다에서 태어나 16세 때 제수이트회에 가입, 살라만카에서 배웠다. 아라비아 및 세고비아에서 철학을 가르치고(1571), 후에 발랴돌리드, 로마, 포르투갈의 코임브라에서 가르친 다음 리스본에서 사망. 언제나 연구에 열중하였으며 많은 학설의 조화·중용을 목표로 했고, 과학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의 동일성을 주장했다.

정치에 대해서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반대하고 국왕의 권리는 민중의 제한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으므로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그의 저서가 불살라지거나 금지되었다. 국제법학(國際法學)에서는 그로티우스의 선구가 되는 사상을 말했다. 그의 영향은 널리 신교의 대학에도 미쳤다.